2008년 07월 25일
[제로의사역마x콜오브듀티4] 제로의 SAS 3화 중편
이것은... 좋은 것이다!
프라이스 대위는 부지런히 빵조각을 입에 옮기면서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콜베르가 학원 경비를 담당하는 위사들을 위해 뭔가 전수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넌지시 물어왔었는데, 프라이스 대위는 전혀 그럴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식당으로 걸어오던 길에 프라이스 대위가 던진 몇 마디에 콜베르도 자기 생각이 짧았던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생각을 해보자.
이 곳은 마법이라는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곳이다.
할케기니아라는 세계는 마법을 쓸 줄 아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유는? 마법이 인간의 완력을 능가하기때문이다. 굳이 완력이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무력을 가볍게 능가하는 것이 마법임에는 확실하다.
주어진 무력이 너무 거대했던 탓인가? 덕분에 다른 무력 수단의 발전이 더뎠다. SAS 대원들이 익히고 있는 조직적인 전투,체술, 임기응변 기타 등등도 정체된 무력 수단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대원들과 마법사들의 무력을 비교하자면 인간 병기로써 갈고닦은 전투능력이 간신히 마법에 필적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 차이가 총기로 인해 밸런스가 붕괴되면서 현재로써는 프라이스 대위 일행쪽이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그런데 학원의 위사들에게 전투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러올 것은 혼란 뿐이다.
잠깐 들춰 봤던 이 대륙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특수전 교리에 맞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인간병기로써의 각종 기술들을 전파한다고? 무슨 끔찍한 소리를… 절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SAS 대원 수준의 혹독한 훈련을견뎌낼 만한 인간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여기에 생겨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다. 거기에 마법이결합되면? 총기나 탄약조차 필요 없이, 짤막한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들이 특수전 훈련을받는다면?
말하기도 싫은 결과가 만들어 질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이유지."
"… 동의합니다. 사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는 이미 여기에도 존재하고 있으니까…."
콜베르의 말이었다. 순간의 회한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프라이스 대위는 놓치지 않았다. 콜베르는 프라이스 대위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간이었고, 프라이스는 그 점을 주목했다. 그는 생각했다.
저런 눈을 안다.
볼장 다 보고 나서야 만들어지는 눈이다.
산자의 눈에서 저런 눈빛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
프라이스 대위는 내색하지 않고 빵을 씹었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주위를 살피던 콜베르는 다시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옆으로는 소프가 있었는데, 그는 마르토 주방장이 대접한 해물 스프를 마시고 있었다. 수프가목으로 넘어가고 입맛 다시는 소리가 할케기니아에 소프가 넘어와서 입으로 낸 소리 중 가장 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이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시방석이었다.
눈 앞에는 온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흑인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사이토의 정면에 누가 뭐라고 해도 성을 팍팍 내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건장한 덩치의 흑인 남자가 앉아있다. 자신의 심정을포크에 담아 음식물을 상대로 분출하고 있는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 정면에 마주앉아 밥먹으면서 소화가 잘 될 위인이 어디에있겠냐는 말인가.
사이토는 속으로 '으윽' 하면서 옆을 돌아봤다. 옆은 그야말로 '으윽'이었다.
"암만 지나온 일이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
"너무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게. 자, 여기 한 잔 받고."
점심 나절부터 프라이스 대위와 콜베르 선생은 대놓고 술대작이다. 그것도 갈리아라는 나라의 비싼(시에스타의 말로는) 와인을가지고 하는 대작인데, 술 없어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저러다가 나중에 울면서 주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소프는….
여전히 해물 스프를 넘기는 소리가 감명깊었다. 도움이 안 되는군.
시에스타에게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 기분 좋았는데… 어째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위기 상황의 타파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인가!?
"뭐 위기라고 할 것 까지야…."
"… 뭐라고?"
험악한 표정의 흑인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조용히 밥 먹자?"
"어… 예."
옆자리는 별로 조용 안하잖아. 사이토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빵을 썰었다.
그런 사이토를 보던 그릭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헤이, 소년."
사이토가 그릭스를 봤다. 소프도 슬며시 눈매가 들리더니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그릭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난 여기가 싫어."
그리고는 다시 빵을 쪼갰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미군 식단이나 전투식량보다는 여기 밥이 월등히 맛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주방의인간들도 그릭스를 특별 취급하긴 매 한가지였다. 몇몇 대범한 인간들은 (콜베르라던가) 상관없다는 투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튼짜증나는 동네인 것은 사실이다.
이건 뭐, 나만 왜 따돌리냐고 분노할 수도 없고.
이를테면 그냥 짜증이었다.
제기랄.
"저도 여기가 별로 좋진 않지요."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였다. 그릭스는 사이토를 쳐다봤다.
사이토는 자기 입을 의심했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컴퓨터가 없어서 하고 싶은 게임도 못하고, 데리버거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하면서 약간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본심이구나.
여기가 불편한 것은 사이토로써도 사실이었다. 자칭 주인님이라는 여자는 막 죽다 살아난 환자에게 팬티를 빨아오라고 시키질않나. 아무리 그 자칭 주인님이 핑크빛 금발의 미소녀라고 해도… 멋대로 혹사당하는 것은 결코 사이토 취향이 아니었다. 사실반발심리로 벌써 몇 건 저질렀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고.
스스로가 말해놓고 울컥했다.
진지하게 따져보면 지금은 그런 상황이다.
사이토의 말을 들은 그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여기 넘어와서 처음으로 지은 웃음이었다.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데?"
사이토는 그릭스가 웃는걸 봤다.
마주 히죽 웃었다.
"미국인이 나와서 총질하는 게임요."
그릭스가 사이토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아, 왜 때려요!"
"내가 미국인이고, 총질도 하거든?"
그렇게 말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헤일로 5 어때요?"
사이토의 말에 그릭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마스터 치프는 멋지지…."
"그렇지요…."
"Finish the Fight!"
"Not Yet!"
"동지! 아니, 브라더!"
"오오오오! 브라더!"
건장한 흑인 청년의 근육질 팔뚝과 일본인 소년의 팔뚝이 서로를 얽으며 크로스했다.
서로를 향해 상쾌한 미소를 짓는데, 마침 쏟아져 들어온 햇빛에 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절묘한 광경에 소프는그야말로 완전히 경도당했다. 무심한 척 식사하면서 둘의 매니악한 대화를 들은 소프는 속으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걸로 의기투합을 하는 거야?
하지만 관심사가 비슷해야 말을 해도 뭔가 통하는 법이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프라이스 대위와 콜베르 선생도 이미 술대작을 하면서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어버렸고 그릭스와 사이토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뭔가 소외당하는 기분인데?
소프는 씩 웃더니 스프를 마저 들이켰다.
프라이스 대위는 콜베르와 함께 2차를… 아니 학원 경비에 대한 좀 더 심오한 성찰을 하기 위해서 그의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위사들이 부족한 것은 태만한 경비태세 뿐이야. 이미 군기는 잡아놨는데… 아무튼 그릭스 자네에게 맡기네. 소프와 협력해서 알아서 처리하게. 어디까지 전달해야 하는지 숙지하고 있지?"
"예. 숙지하고 있습니다."
"믿고 맡기네."
그리고는 그릭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이토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 전달 사항은 대화한 내용이 전부군. 나머지는 개즈가 잘 해 주기를 기다릴 뿐인가?"
"언제쯤 돌아올 것 같습니까?"
콜베르의 물음이었다.
"글쎄, 늦어도 모레나 글피 정도면… 일이 생기면 더 빨라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을 거요. 사실 정기연락을 취할까했는데, 그러기엔 장비가 너무 아깝군. 우리가 가져온 장비의 유지 보수도 장기계획의 일부니까 지금으로써는 함부로 쓸 수가 없소."
"그렇군요."
프라이스 대위는 이로써 한 시름 놓았다. 그릭스에게도 뭔가 집중할 일이 생긴 것이다. 내심 대원들의 전투피로증 같은 심적인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뭔가 할 일이 생겼다고, 거기에 달려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미봉책이고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솔직히 말해서 해결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이토, 왜 그러나?"
어째 주위에서 계속 눈치보고 얼쩡거린다는 느낌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가슴 한 구석이 욱신했다. 이 기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침에도 느꼈던 그 것이겠지…. 말하자면, 무기력함. 그리고 지금은….
그런 기분을 떨쳐버릴 기회 아닐까?
그래서 입이 멋대로 내뱉도록 내버려뒀다.
"저를 훈련을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뭐?"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살아가는데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이토의 말이었다.
프라이스 대위는 생각했다. 이건 자신이 원했던 반응이 아닌가? 사이토가 먼저 찾아와서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한다. 이런이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마음가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판단임에 틀림 없었고 실제로 사이토는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문제는 사이토가 그렇게까지 절박해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프라이스 대위가 뚱한 표정을 짓자 당황해서 소프와 그릭스를 돌아봤다.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맡아서 단련시키면…."
"좀 생각해 볼 문제로군. 나도 생각을 해볼 테니, 사이토 너도 왜 훈련이 필요한지 좀 더 고민해보고 오도록 해라."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일행은 각자의 볼일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콜베르가 물었다.
"왜 거절하셨습니까?"
"거절한 적 없는데."
"내용이야 거절이 아니었지만 지금 사이토에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는 당신들 뿐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리나? 인심이 후하군. 자신에게 박하거나."
콜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이토 군의 의지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프라이스 대위는 글쎄… 하고 생각했지만 곧 말문을 열었다.
"아니, 사이토가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말한 것 자체는 기쁘군. 하지만… 그래. 거절은 아니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고오라고 했을 뿐이지. 일시적인 무력감과 공황 때문에 붙들었던 목표는 단지 허상이고… 똑같은 일을 해내려고 하더라도 마음가짐이다르면 성취도 다른 법. 무기력함? 그런 건 인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소. 중요한 것, 인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그런 순간의감정이 아니오."
"그럼, 뭡니까?"
콜베르의 물음에 프라이스 대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의무(Duty)."
늦은 시간, 수업 시간에 저지른 만행 때문에 루이즈의 방에서 쫓겨난 사이토는 여차저차하여 퀴르케의 방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퀴르케의 유혹에 넘어가 거사를 치를 즈음에 난입한 루이즈의 활약으로 방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왜 채찍 같은 걸 갖고 있는 거야."
"승마용 채찍이니까 너한테는 딱 맞네. 너는 들개니까!"
"들개는 무슨!"
그리고 루이즈는 사이토를 신나게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채찍으로 때리는 소리가 방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그철썩거리는 소리에 그릭스와 소프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마침 사이토와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온 차였는데 안에서 들려오는 채찍소리는 둘로 하여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녀석들!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냐!
"아얏! 그만둬! 바보!"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릭스는 고뇌했다.
벌써부터 그런 플레이냐!
너희들은 일러!
"뭐야! 대체 그런 여자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
그리고 잠깐 더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릭스는 문에 귀를 들이댔다. 소프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릭스는 가만히 손짓했다. 소프는 여전히 어이없는 표정을지은 채로… 그릭스를 따라 귀를 들이댔다. 그릭스는 하란다고 진짜로 하냐고, 그런 시선을 보냈지만 소프에게서 대답을 들을 길은없었다.
"이거 놔…! 바보!"
"있지, 너, 혹시…. 질투? 나에게 반한 거야? 혹시 내가 퀴르케의 침대에는 앉아놓고 네 침대에는 파고들질 않아서 화난 거야? 아니, 진짜 몰랐다. 미안."
그릭스는 이마를 쳤다.
이 자식이 말하는 센스 하고는!
그리고 예상대로 격분한 루이즈가 사이토를… 뭐 어떻게 한 모양이다. 사이토의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대충 상황이정리된 모양이군. 이대로 알콩달콩한 분위기라도 되어버리면 어찌하나 했는데 잘 됐다는 둥.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릭스는 헛기침을했다. 그리고 소프가 문을 두들겼다.
헉, 하는 소리. 허둥지둥하는게 문 밖으로 느껴진다.
설마 진짜로 그렇고 그런….
"누… 누구세요?"
"나다."
문 안쪽에서 "그릭스인가?"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잠깐 두런두런하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릭스는 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루이즈의 채찍을 보고 참으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대체 뭐 하던 중이었냐?"
"아… 아무것도…."
"사역마의 버릇을 고치고 있는 중이예요! 용건이 없으면 당장…."
그릭스는 손을 들어 루이즈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기까지, 라는 제스쳐였다. 말을 가로막힌 루이즈는 도끼눈을 떴지만 거기에그릭스는 사역마의 버릇 운운하는 부분에서 그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에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니 잠깐, 내가 무슨 기대를 했다는 말이지?
아무튼 사역마니 기대니 운운하는 것을 보니 둘 사이의 관계도 별로 진전이 없는 모양이었다. 루이즈의 사고방식도 주인님과주인님을 보필하는 사역마 사이에는 인간관계라는게 성립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고…. 방금전까지 사이토가 겪은 꼴이 소급적용하면자신이나 프라이스 대위 일동에게도 '루이즈가 할 수만 있었다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릭스는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아이를 두고 이죽거릴 정도로 철이 없진 않았다.
"물론 볼일이 있지. 사이토와 할 얘기가 있다."
대화 잠깐 나누려고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별로 비밀스러운 얘기도 아니고 해서 루이즈의 방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그릭스는 내심 루이즈가 동석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밖에 다시 사이토를 내보냈다가 퀴르케에게 다시유혹이라도 당할까 싶었던 루이즈가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무시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에요?"
짐짓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지만 사실 무슨 얘기를 꺼내올 지는 사이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낮에 프라이스 대위에게 꺼냈던 훈련 이야기겠지. 아니면 자신의 왼손 등에 새겨진….
둘 다일지도 모르고.
"아까 그… 낮의 훈련 얘기 말인데."
역시.
"훈련?"
루이즈의 말이었다. 물론 루이즈가 알 턱이 없었다.
그릭스나 소프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토는 직접 설명했다.
"내가 프라이스 대위님한테 부탁했어. 날 좀 훈련시켜달라고."
"왜?"
루이즈가 고개를 갸웃 했다.
"그야 뭐 할 일도 없고… 사역마인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상관 없다며?"
"그, 그야… 상관 없지만, 있어!"
"어느 쪽이야!"
"잠깐, 거기까지만 해라. 나도 얘기좀 하자."
그릭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사이토. 우선 한 가지만 물어보자. 왜 훈련을 받고 싶다고 했지?"
"……."
사이토가 우물쭈물하는데 그릭스는 정곡을 찔렀다.
"진짜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심심해서 해보자고 한 건 아니겠지? 미리 말하지만 훈련은 정말로 고될 거다. 너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야. 극한까지 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라면, 그냥 관둬라."
루이즈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훈련이길래 이렇게까지 겁을 주는 거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네 심정은 이해가 간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사이토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당신도, 똑같았군요.
"무기력하지. 우리들은 지금 무기력해. 그래서 뭔가를 해보자는 건, 좋은 시도야.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되는 거야.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큰… 그런 결심이 필요하다. 더 바른 마음가짐이… 뭐 그렇지. 이해하냐?"
"… 예."
사이토는 자신이 그릭스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릭스는 충분히 지적인 남자였다. 자신이 각종 매체에서 접해온 '전형적인 흑인상'과 모습은 비슷했지만 생각의 깊이는천지차이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던, 그리고 여러 매체를 통해 주입되어 왔던 전형적인 흑인이 결코 아니었다. 넓게 보자면자신이나 할케기니아의 인간들이나 그릭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별로 차이도 없었던 셈이다.
그도 당연히 스스로에 대해서 고찰할 줄 알고 문제점이 있으면 해결할 방법을 찾는, 그런 인간이다. 사이토 자신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인생의 선배였다.
"그래. 아니… 그… 미안하다. 괜히 공격적으로 말할 것 같군."
"괜찮아요."
"고맙다. 아무튼 프라이스 대위도 그런 이유에서 저어한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아쉬워한 것이겠지. 아무튼 속시원하게인정하자고. 우리가 지금 무기력하다고.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나와 함께 훈련을 하자. 우리의 문제점을인정하고,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말야. 소프가 도와 줄거다. 콜베르 선생의 말로는 넌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모양이니까훈련의 난이도는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을 테고… 아무튼 각자를 위해서 열심히 해보자."
불현듯 나타났고 불현듯 사라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저게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인가? 생리인가? 대충 그런 잡생각을 하던 사이토는 옆에서 루이즈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뚱한 표정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심란한 표정이었는데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토는먼저 물었다.
"왜?"
루이즈는 숨을 한껏 들이쉬더니 사이토에게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주인님의 허락도 없이 왜 갑자기 훈련이니 하는 걸 혼자 멋대로 결정하는거야?"
"허락이 필요하냐.'
사이토는 귀를 후볐다.
루이즈는 분개했지만,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자기 말이라고는 죽어라고 듣지 않는 사역마이자… 이세계에서 온 남자아이.
사이토 혼자 이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았겠지만, 그 이세계라는 곳에서 온 사람이 지금 이 학원에는 사이토를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있다. 게다가 소프가 기쉬의 청동 골렘들을 상대하면서 사용했던 파괴적인 병기는 할케기니아에는 존재하지않는다.
정말로 이세계 사람이라고?
"무기력하다는건 뭐야."
"별로 상관 없잖아."
"사역마의 건강 관리도 주인님의 의무야."
"그런 이유냐."
사이토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 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심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사이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옷자락을 붙잡혀서 뒤를 돌아봤다.
루이즈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
사이토는 이마를 짚더니 바닥에 걸터 앉았다.
"그냥 할 일이 없고 할 수도 없으니까 피곤하고 지쳤던 거야."
"너는 내 사역마잖아. 사역마의 일만 충실히 하면 돼."
그렇게 말이야 어디 납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얼마전에 기쉬와 싸울 때 루이즈의 앞에서 '숙이기 싫은 머리는 숙일 수 없어' 따위의 말을 잘도 내뱉어 놓은 주제에루이즈에게 온갖 험한 일은 다 당하면서도 꼬박꼬박 사역마 일을 하는 걸 보니, 뭐…. 사이토는 그런 사실을 인정할 만큼 대범하진않았지만 무턱대고 사역마 일을 하는 것이 싫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루이즈는 청초하고… 귀엽다. 사이토 취향이니까.
지금 진지해 보이는 저 눈은 사역마에 대한 걱정쯤 될까?
남자는 슬픈 생물이구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사이토는 말을 돌렸다.
"별거 아니라니까. 난 잔다. 안녕."
"아까부터 어딜 계속 나가려고 하는거야!?"
루이즈가 사이토의 파카 자락을 붙들은 채로 놓아주지 않으면서 외쳤다.
"밖에서 자라고 쫓겨나지 않았었냐?"
"됐어. 방에서 자. 그러다 또 퀴르케가 덮치면 큰일이잖아."
사이토는 그것도 그렇겠다 싶어서 얌전히 짚더미에다가 모포를 깔았다. 입밖으로 '역시 너 나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둥의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걷어차기 싫어서 그냥 얌전히 불 끄고 누웠다. 루이즈도 얇은 네글리제 차림으로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사이토가 양손을 포개고 누워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훈련은 뭐야…?"
좀 자자!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렇지만 사이토는 그 정도는 대답해줘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냥 순순히 대답했다.
"그릭스가 말했잖아. 살아남기 위한 훈련이라고.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도 아니고, 위험천만하단 말이지."
"여기는 트리스테인 마법학원이야. 이 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
사이토는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내가 당한 걸 생각하면 별로 그렇게까지 안전한 곳은 아닌 것 같던데?"
"그야 사역마에다가 평민인 주제에 자존심이나 부리니 그랬지!"
그런 녀석이 상대라면 누구라도 싸우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이토는 꾹 참았다.
좀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아무튼 여긴 위험해. 몸을 지킬 방법을 모르는 나로써는 더욱. 아, 맞군. 내일은 소프한테 호신용 무기라도 달라고 해볼까…."
루이즈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너. 검도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 요전에 쓴 건 기쉬의 검이었어."
"검사(劍士)잖아? 너."
사이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어둠 속에서 루이즈가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니야. 검 같은 건 쥐어본 적도 없어."
"요전에는 자유자재로 다뤘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 말에 루이즈는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아까 그 검은 남자가 말했지? 콜베르 선생님이, 네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사이토는 벌떡 일어났다.
"네가 불러냈잖아. 그 사람 이름은 그릭스야. 이젠 좀 외우라고."
"들을 일도 별로 없었잖아. 이젠 외우고 있어. 아무튼, 그렇다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너의 사역마로써의 특수 능력이라는 거네…. 그래, 좋아."
그리고 루이즈는 도로 누웠다.
"뭐가 좋은데?"
"너에게 검을 사 주겠어. 퀴르케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니, 호신용 검 정도는 필요할 것 아냐?"
"어?"
사이토는 당황해서 말했다.
"의외네."
"뭐가."
"아니, 난 네가 구두쇠인줄 알았거든."
루이즈는 사이토의 무신경한 말에 그만 배게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췄다.
"아야! 왜!"
무기력하니 뭐니 해서 기껏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 평민 사역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하지만 가만 손에 집히는 걸 던지고 보니, 머리를 누일 배게가 없었다.
도로 가지러 내려가는 건 자존심 상하고… 그런데 사이토가 부스럭부스럭 하더니 배게를 침대 위에 올려놨다. 루이즈는 그런 사이토의 흐릿한 형체를(어두우므로)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더니,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쨌든 내일은 허무의 휴일이니까, 마을로 데려다 줄게. 얼른 자!"
그렇게 루이즈네가 주종관계인지 연애질인지 구분도 잘 안 되는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개즈는 트리스타니아의질퍽한 뒷골목을 뛰어다니며 한껏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지형도 잘 모르는 동네였고 바닥은 각종 오물로 뒤덮혀서 악취가 한껏올라오고 있는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개즈는 개의치 않았다. 판타지 세계의 뒷골목이라고 해도 엄연히 도시의 뒷골목. 자연속에서 새벽 이슬 맞으며 능선 아래로 발각되지 않으려 애쓰며 사주경계를 하며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괴… 괴물 새끼!"
개즈는 그 말을 듣고는 씨익 웃었다.
"체력이 그렇게 모자라서 어쩌냐. 직업이 직업이면 도망치는 연습도 평소에 좀 해뒀어야지."
그런데 도망치는 연습을 평소에 해왔는데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실 달음박질로 SAS 대원을, 체력으로 따돌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SAS라는 놈들은 5km를 20분 내에구보로 완주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기록으로 치는 족속들이다. 35파운드씩 되는 짐을 짊어지고 무장행군을 밥먹듯이 하면서 체력을단련한 인간을 아무리 도망치는 연습을 했다지만 체력으로 따돌릴 생각을 했다니, 꿈도 야무졌다.
개즈는 웃으면서 그대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지? 얘기 좀 하자는데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야 손님이 오겠나."
"으아아아―!"
"결국 그렇게 되는군."
절망적이었는가!
나이프를 뽑아들고, 손에 쥔 채로 달려든다. 하지만 개즈는 혀를 찰 뿐이었다. 바보같이! 나이프는 그렇게 뽑아들고 찌르려고달려드는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경시할 것도 아니었다. 나이프로 인한 전투능력 손실은 아차 하는 순간에 닥쳐올 수 있다. 개즈가아무리 전투의 달인이라지만 칼을 든 상대는 쉽게 제압할 게 아니었다.
다행히 공격이 직선적이니 피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상대는 역시 바보였다. 나이프를 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기에집착하게 된다. 이를테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종류의 심리였다. 적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심리는 뭐가 중요한지 잊게 만든다.
이 경우에는 개즈를 죽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개즈는 나이프를 뽑아들며 거리를 벌렸다. 상대는 두려운지 바로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프란 무기는 상대에게 인지되면서 정숙성을 잃는 순간에 기습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개즈는 여전히 유리했다. 왜냐면, 총이 있으니까.
상대는 개즈가 거리를 벌리며 총을 뽑아드는 것을 보고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권총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극적인 반응은, USP45 택티컬의 소음기가 달려있는 총구에서 초연이 피어 오른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탕! 하는 경쾌한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퓩. 그런 소리가 아주 무감동하게 잠깐 흘렀다. 손을 맞춰서 무기 강탈을 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은아니지만 개즈에겐 자신이 있었다.
거의 박살이 난 오른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길래 진작에 협조를 하지 그랬어."
날은 어찌나 열심히 갈아놨는지 땅에 푹 하고 박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서로 나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라면상대의 전투능력을 뺏기 위한 더티하기 그지없는 도그파이팅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프를 검집에 꽂아넣은 상태인 녀석이 비무장으로달려오는 사람을 상대로 나이프를 뽑아들고 돌격을 하다니. 초보는 어쩔 수 없나보다.
개즈는 USP45를 집어넣고 왼손에 들린 코만도 나이프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걸로는… 심심한데 협박이나 해볼까?
"입 닥치지 않으면 손바닥 구멍을 이걸로 후벼주겠다."
바로 닥친다.
매우 좋군.
윽, 윽, 하면서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좀 미안하긴 미안했다만은 나이프를 들고 죽일 작정으로달려든 상대를 동정할 정도로 개즈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개즈는 남자를 뒤돌려 세운 후 탄피를 주우며 말했다.
"일단은… 뭐, 돌아가자고.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 만약 도망치다가는 이번에는 뇌가 신선한 바람을 쐬게 만들어 준다?"
남자는 개즈를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남자의 절박함에 개즈는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개즈가 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트리스타니아의 뒷세계… 라고 할 만한 영역의 포섭.
구체적으로는, 정보원 확보였다.
그를 위해서 복면을 뒤집어쓰고 자경단(폭력조직을 겸하는)을 밟아놓고, 장물시장을 휘젓고 정보원을 쫓아다니는 등의 활약을해야만 했다. 이미 예전부터 해오던 작업이었고 메이지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 이 뒷세계에서 개즈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이번 경우는 정보원 추적이었는데… 굳이 정보원이 개즈로부터 도망 갈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개즈 본인이 흘린자신에 대한 과장된 소문 따위가 그 원인이었다고 할까. 왜 지레 겁먹고 도망을 쳤는지, 원.
그래서 정보원이 도망치기 시작했던 장소, 그러니까 은신처로 돌아왔다. 의외로 멀끔해보이는 여관에서 먹고 자고 있었는데 개즈가 들이닥치자마자 창밖으로 뛰쳐나가서 도망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쫓아다닌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보실까."
개즈의 생활 신조는, 「취조는 묶어놓고―」였다.
그래서 정보원은 의자에 꽁꽁 묶인 채로 떠들어댔다.
"뭐, 뭘 시작한다는 거요!?"
"우리 대위님을 좀 따라해볼까 했지. 그런데 자네는 핵폭탄을 누가 줬는지도 모르고 이므란 자카예프가 누군지도 모를테니 그건 생략하지. 내가 폭탄이 대체 어디서 났냐고, 이름을 대라고 두들겨 패지는 않는다는 뜻이야. 알겠지?"
알아들을 만한 부분은 폭탄이니 이름을 대라느니 하는 부분 뿐이었지만 어쨌든 냅다 두들겨 패지는 않겠다고 하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개즈는 피식 웃었다. 알긴 뭘 알어.
"내가 저번에 의뢰했던 일 말이야. 장물 시장을 이용하는 손님들 중에서 메이지는 얼마나 되는가. 구체적으로 인명록을건네달라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도망쳤지? 아아, 변명하지 마. 묻는 말에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만 해라.인명록이 있어? 없어?"
"이… 있는데…."
"어디?"
"저기 서랍 안쪽에…."
어지간히도 찾기 쉬운 데에다가 갔다놨군.
개즈는 인명록을 가져다가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굳이 인명록을 준비해 놨으면서 왜 도망쳤지?"
쉽게 대답하지 않는군.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개즈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정보원 찾으면 되니까 댁이 협조하나마나 내겐 큰 문제는 없어. 하지만 손바닥에 총구멍을 냈다고 내게 악의를 품게 된 뒷세계 인간을 그냥 보내주는 것도 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이건 어느 정도 거짓말이었다. 개즈가 무슨 조직폭력배도 아니고 약장수도 뭣도 아닌데 뒷세계 생리를 꿰어찰 수 있을리가 없지않은가. 기껏해야 이름 좀 날리기 시작했을 뿐인데…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서 시행착오가 많은 편이었고, 지금 터놓고 거래하는정보원은 이 남자 뿐이다. 다른 정보원을 구하는 것은 시간을 꽤 잡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개즈 눈 앞의 정보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정도의 정신머리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겠소! 말할테니 제발…."
"해봐."
"목숨을 위협받았소."
개즈가 흥미를 느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이야기인 즉슨.
최근 장물 시장에 개즈가 뿌린 이야기(인명록 관련해서 메이지를 걸러낸다는)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얘기가 좀 오간모양이었다. 이미 개즈는 소재지부터 시작해서 어느 정도는 얼굴이 팔린 인물이었는데, 그런 개즈가 인명록을 모은다는 소문이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사실 정보원이라는 종자들은 의뢰인이 뭔가 일을 의뢰했다는 사실 조차도 정보로 흘려서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놈들이니… 개즈의 인명록 이야기가 남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그 이야기에 심기가 거슬린 메이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댁도 제법 신세가 기구하군."
"반쯤은 당신이 일조한 거요. 그런 일거리, 받지 않았다면 죽을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겠지. 책임지시오."
"정보를 팔아먹은 건 내가 아닌데.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내게 인명록을 건네주면 댁을 죽이겠다고 했다? 내가 아니고, 당신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개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덮치는 편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건 일종의 경고… 아니, 경고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좀 초보적인데….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운이 좋다.
"구체적으로 무슨 협박을 당했지?"
"인명록을 넘기면 죽인다는 협박."
"메이지인건 확실하나?"
"공중에 띄워졌소."
"인상착의는 기억이 나나?"
"맨 입에는 말 못하지."
자식이, 배짱 좀 있는데.
"… 좋아. 성의를 보였으니."
개즈는 밧줄을 풀어줬다.
구멍이 뻥하고 뚫린 손부터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개즈가 말했다.
"덧붙여서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지. 그러니까 말해봐. 누구야? 대체?"
정보원은 오른손을 조심스레 무릎 위에 올려둔 채로 얘기를 꺼냈다.
"키가 160상트 정도였소. 목소리는 마법으로 변조를 했기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데…."
"다른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나?"
"어… 그게… 아, 그게 있었군. 머리카락이 초록색이었소."
"초록색? 확실한가?"
"그렇소. 연한 초록색. 머리카락을 흘리고 갔기 때문에 확신하고 있소."
그건 좋은 정보로군. 개즈는 제법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에큐 금화가 몇 닢 들어있는 주머니를 안겨주면서 말했다.
"한가지 더 궁금한데, 대체 인명록까지 준비했으면서 그걸 가지고 도망이라도 치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뭐지?"
"… 그야, 당신이 찾아오기 바로 전에 협박을 당했으니까 그렇지. 개즈, 당신이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엇갈리진 않았을 거요."
그런 건 진작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까지 습격을 당하지 않았으니 이미 이 주변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어째 상대는 급해보이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치료비라도 하라고 평소 때보다 더 넣었소."
"녀석이 다시 찾아오면 어쩌지?"
개즈는 피식 웃었다. 상대로써는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개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야 댁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아무튼 살려주려고 노력은 해 볼테니 당신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금은 내 코가 석자라."
SAS 22연대원 한 사람이, 트리스타니아의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보원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구멍이 휑하게 뚫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창밖으로 그리고 손바닥의 구멍 너머로 점처럼 줄어드는 개즈의 모습이 보였다.
프라이스 대위는 부지런히 빵조각을 입에 옮기면서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콜베르가 학원 경비를 담당하는 위사들을 위해 뭔가 전수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넌지시 물어왔었는데, 프라이스 대위는 전혀 그럴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식당으로 걸어오던 길에 프라이스 대위가 던진 몇 마디에 콜베르도 자기 생각이 짧았던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생각을 해보자.
이 곳은 마법이라는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곳이다.
할케기니아라는 세계는 마법을 쓸 줄 아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유는? 마법이 인간의 완력을 능가하기때문이다. 굳이 완력이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무력을 가볍게 능가하는 것이 마법임에는 확실하다.
주어진 무력이 너무 거대했던 탓인가? 덕분에 다른 무력 수단의 발전이 더뎠다. SAS 대원들이 익히고 있는 조직적인 전투,체술, 임기응변 기타 등등도 정체된 무력 수단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대원들과 마법사들의 무력을 비교하자면 인간 병기로써 갈고닦은 전투능력이 간신히 마법에 필적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 차이가 총기로 인해 밸런스가 붕괴되면서 현재로써는 프라이스 대위 일행쪽이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그런데 학원의 위사들에게 전투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러올 것은 혼란 뿐이다.
잠깐 들춰 봤던 이 대륙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특수전 교리에 맞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인간병기로써의 각종 기술들을 전파한다고? 무슨 끔찍한 소리를… 절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SAS 대원 수준의 혹독한 훈련을견뎌낼 만한 인간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이 여기에 생겨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다. 거기에 마법이결합되면? 총기나 탄약조차 필요 없이, 짤막한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들이 특수전 훈련을받는다면?
말하기도 싫은 결과가 만들어 질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이유지."
"… 동의합니다. 사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는 이미 여기에도 존재하고 있으니까…."
콜베르의 말이었다. 순간의 회한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프라이스 대위는 놓치지 않았다. 콜베르는 프라이스 대위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간이었고, 프라이스는 그 점을 주목했다. 그는 생각했다.
저런 눈을 안다.
볼장 다 보고 나서야 만들어지는 눈이다.
산자의 눈에서 저런 눈빛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
프라이스 대위는 내색하지 않고 빵을 씹었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주위를 살피던 콜베르는 다시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옆으로는 소프가 있었는데, 그는 마르토 주방장이 대접한 해물 스프를 마시고 있었다. 수프가목으로 넘어가고 입맛 다시는 소리가 할케기니아에 소프가 넘어와서 입으로 낸 소리 중 가장 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이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가시방석이었다.
눈 앞에는 온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흑인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사이토의 정면에 누가 뭐라고 해도 성을 팍팍 내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건장한 덩치의 흑인 남자가 앉아있다. 자신의 심정을포크에 담아 음식물을 상대로 분출하고 있는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 정면에 마주앉아 밥먹으면서 소화가 잘 될 위인이 어디에있겠냐는 말인가.
사이토는 속으로 '으윽' 하면서 옆을 돌아봤다. 옆은 그야말로 '으윽'이었다.
"암만 지나온 일이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
"너무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게. 자, 여기 한 잔 받고."
점심 나절부터 프라이스 대위와 콜베르 선생은 대놓고 술대작이다. 그것도 갈리아라는 나라의 비싼(시에스타의 말로는) 와인을가지고 하는 대작인데, 술 없어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저러다가 나중에 울면서 주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소프는….
여전히 해물 스프를 넘기는 소리가 감명깊었다. 도움이 안 되는군.
시에스타에게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 기분 좋았는데… 어째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위기 상황의 타파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인가!?
"뭐 위기라고 할 것 까지야…."
"… 뭐라고?"
험악한 표정의 흑인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조용히 밥 먹자?"
"어… 예."
옆자리는 별로 조용 안하잖아. 사이토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빵을 썰었다.
그런 사이토를 보던 그릭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헤이, 소년."
사이토가 그릭스를 봤다. 소프도 슬며시 눈매가 들리더니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그릭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난 여기가 싫어."
그리고는 다시 빵을 쪼갰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미군 식단이나 전투식량보다는 여기 밥이 월등히 맛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주방의인간들도 그릭스를 특별 취급하긴 매 한가지였다. 몇몇 대범한 인간들은 (콜베르라던가) 상관없다는 투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튼짜증나는 동네인 것은 사실이다.
이건 뭐, 나만 왜 따돌리냐고 분노할 수도 없고.
이를테면 그냥 짜증이었다.
제기랄.
"저도 여기가 별로 좋진 않지요."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였다. 그릭스는 사이토를 쳐다봤다.
사이토는 자기 입을 의심했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컴퓨터가 없어서 하고 싶은 게임도 못하고, 데리버거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하면서 약간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본심이구나.
여기가 불편한 것은 사이토로써도 사실이었다. 자칭 주인님이라는 여자는 막 죽다 살아난 환자에게 팬티를 빨아오라고 시키질않나. 아무리 그 자칭 주인님이 핑크빛 금발의 미소녀라고 해도… 멋대로 혹사당하는 것은 결코 사이토 취향이 아니었다. 사실반발심리로 벌써 몇 건 저질렀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고.
스스로가 말해놓고 울컥했다.
진지하게 따져보면 지금은 그런 상황이다.
사이토의 말을 들은 그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여기 넘어와서 처음으로 지은 웃음이었다.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데?"
사이토는 그릭스가 웃는걸 봤다.
마주 히죽 웃었다.
"미국인이 나와서 총질하는 게임요."
그릭스가 사이토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아, 왜 때려요!"
"내가 미국인이고, 총질도 하거든?"
그렇게 말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헤일로 5 어때요?"
사이토의 말에 그릭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마스터 치프는 멋지지…."
"그렇지요…."
"Finish the Fight!"
"Not Yet!"
"동지! 아니, 브라더!"
"오오오오! 브라더!"
건장한 흑인 청년의 근육질 팔뚝과 일본인 소년의 팔뚝이 서로를 얽으며 크로스했다.
서로를 향해 상쾌한 미소를 짓는데, 마침 쏟아져 들어온 햇빛에 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절묘한 광경에 소프는그야말로 완전히 경도당했다. 무심한 척 식사하면서 둘의 매니악한 대화를 들은 소프는 속으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걸로 의기투합을 하는 거야?
하지만 관심사가 비슷해야 말을 해도 뭔가 통하는 법이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프라이스 대위와 콜베르 선생도 이미 술대작을 하면서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어버렸고 그릭스와 사이토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뭔가 소외당하는 기분인데?
소프는 씩 웃더니 스프를 마저 들이켰다.
프라이스 대위는 콜베르와 함께 2차를… 아니 학원 경비에 대한 좀 더 심오한 성찰을 하기 위해서 그의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위사들이 부족한 것은 태만한 경비태세 뿐이야. 이미 군기는 잡아놨는데… 아무튼 그릭스 자네에게 맡기네. 소프와 협력해서 알아서 처리하게. 어디까지 전달해야 하는지 숙지하고 있지?"
"예. 숙지하고 있습니다."
"믿고 맡기네."
그리고는 그릭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이토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 전달 사항은 대화한 내용이 전부군. 나머지는 개즈가 잘 해 주기를 기다릴 뿐인가?"
"언제쯤 돌아올 것 같습니까?"
콜베르의 물음이었다.
"글쎄, 늦어도 모레나 글피 정도면… 일이 생기면 더 빨라질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을 거요. 사실 정기연락을 취할까했는데, 그러기엔 장비가 너무 아깝군. 우리가 가져온 장비의 유지 보수도 장기계획의 일부니까 지금으로써는 함부로 쓸 수가 없소."
"그렇군요."
프라이스 대위는 이로써 한 시름 놓았다. 그릭스에게도 뭔가 집중할 일이 생긴 것이다. 내심 대원들의 전투피로증 같은 심적인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뭔가 할 일이 생겼다고, 거기에 달려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미봉책이고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솔직히 말해서 해결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이토, 왜 그러나?"
어째 주위에서 계속 눈치보고 얼쩡거린다는 느낌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가슴 한 구석이 욱신했다. 이 기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침에도 느꼈던 그 것이겠지…. 말하자면, 무기력함. 그리고 지금은….
그런 기분을 떨쳐버릴 기회 아닐까?
그래서 입이 멋대로 내뱉도록 내버려뒀다.
"저를 훈련을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뭐?"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살아가는데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이토의 말이었다.
프라이스 대위는 생각했다. 이건 자신이 원했던 반응이 아닌가? 사이토가 먼저 찾아와서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한다. 이런이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마음가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판단임에 틀림 없었고 실제로 사이토는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문제는 사이토가 그렇게까지 절박해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프라이스 대위가 뚱한 표정을 짓자 당황해서 소프와 그릭스를 돌아봤다.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맡아서 단련시키면…."
"좀 생각해 볼 문제로군. 나도 생각을 해볼 테니, 사이토 너도 왜 훈련이 필요한지 좀 더 고민해보고 오도록 해라."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일행은 각자의 볼일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콜베르가 물었다.
"왜 거절하셨습니까?"
"거절한 적 없는데."
"내용이야 거절이 아니었지만 지금 사이토에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는 당신들 뿐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리나? 인심이 후하군. 자신에게 박하거나."
콜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이토 군의 의지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프라이스 대위는 글쎄… 하고 생각했지만 곧 말문을 열었다.
"아니, 사이토가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말한 것 자체는 기쁘군. 하지만… 그래. 거절은 아니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고오라고 했을 뿐이지. 일시적인 무력감과 공황 때문에 붙들었던 목표는 단지 허상이고… 똑같은 일을 해내려고 하더라도 마음가짐이다르면 성취도 다른 법. 무기력함? 그런 건 인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소. 중요한 것, 인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그런 순간의감정이 아니오."
"그럼, 뭡니까?"
콜베르의 물음에 프라이스 대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의무(Duty)."
늦은 시간, 수업 시간에 저지른 만행 때문에 루이즈의 방에서 쫓겨난 사이토는 여차저차하여 퀴르케의 방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퀴르케의 유혹에 넘어가 거사를 치를 즈음에 난입한 루이즈의 활약으로 방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왜 채찍 같은 걸 갖고 있는 거야."
"승마용 채찍이니까 너한테는 딱 맞네. 너는 들개니까!"
"들개는 무슨!"
그리고 루이즈는 사이토를 신나게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채찍으로 때리는 소리가 방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그철썩거리는 소리에 그릭스와 소프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마침 사이토와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온 차였는데 안에서 들려오는 채찍소리는 둘로 하여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녀석들!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냐!
"아얏! 그만둬! 바보!"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릭스는 고뇌했다.
벌써부터 그런 플레이냐!
너희들은 일러!
"뭐야! 대체 그런 여자의 어디가 좋다는 거야!"
그리고 잠깐 더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릭스는 문에 귀를 들이댔다. 소프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릭스는 가만히 손짓했다. 소프는 여전히 어이없는 표정을지은 채로… 그릭스를 따라 귀를 들이댔다. 그릭스는 하란다고 진짜로 하냐고, 그런 시선을 보냈지만 소프에게서 대답을 들을 길은없었다.
"이거 놔…! 바보!"
"있지, 너, 혹시…. 질투? 나에게 반한 거야? 혹시 내가 퀴르케의 침대에는 앉아놓고 네 침대에는 파고들질 않아서 화난 거야? 아니, 진짜 몰랐다. 미안."
그릭스는 이마를 쳤다.
이 자식이 말하는 센스 하고는!
그리고 예상대로 격분한 루이즈가 사이토를… 뭐 어떻게 한 모양이다. 사이토의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대충 상황이정리된 모양이군. 이대로 알콩달콩한 분위기라도 되어버리면 어찌하나 했는데 잘 됐다는 둥.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릭스는 헛기침을했다. 그리고 소프가 문을 두들겼다.
헉, 하는 소리. 허둥지둥하는게 문 밖으로 느껴진다.
설마 진짜로 그렇고 그런….
"누… 누구세요?"
"나다."
문 안쪽에서 "그릭스인가?"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잠깐 두런두런하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릭스는 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루이즈의 채찍을 보고 참으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대체 뭐 하던 중이었냐?"
"아… 아무것도…."
"사역마의 버릇을 고치고 있는 중이예요! 용건이 없으면 당장…."
그릭스는 손을 들어 루이즈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기까지, 라는 제스쳐였다. 말을 가로막힌 루이즈는 도끼눈을 떴지만 거기에그릭스는 사역마의 버릇 운운하는 부분에서 그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에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니 잠깐, 내가 무슨 기대를 했다는 말이지?
아무튼 사역마니 기대니 운운하는 것을 보니 둘 사이의 관계도 별로 진전이 없는 모양이었다. 루이즈의 사고방식도 주인님과주인님을 보필하는 사역마 사이에는 인간관계라는게 성립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고…. 방금전까지 사이토가 겪은 꼴이 소급적용하면자신이나 프라이스 대위 일동에게도 '루이즈가 할 수만 있었다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릭스는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아이를 두고 이죽거릴 정도로 철이 없진 않았다.
"물론 볼일이 있지. 사이토와 할 얘기가 있다."
대화 잠깐 나누려고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별로 비밀스러운 얘기도 아니고 해서 루이즈의 방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그릭스는 내심 루이즈가 동석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밖에 다시 사이토를 내보냈다가 퀴르케에게 다시유혹이라도 당할까 싶었던 루이즈가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무시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에요?"
짐짓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지만 사실 무슨 얘기를 꺼내올 지는 사이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낮에 프라이스 대위에게 꺼냈던 훈련 이야기겠지. 아니면 자신의 왼손 등에 새겨진….
둘 다일지도 모르고.
"아까 그… 낮의 훈련 얘기 말인데."
역시.
"훈련?"
루이즈의 말이었다. 물론 루이즈가 알 턱이 없었다.
그릭스나 소프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토는 직접 설명했다.
"내가 프라이스 대위님한테 부탁했어. 날 좀 훈련시켜달라고."
"왜?"
루이즈가 고개를 갸웃 했다.
"그야 뭐 할 일도 없고… 사역마인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상관 없다며?"
"그, 그야… 상관 없지만, 있어!"
"어느 쪽이야!"
"잠깐, 거기까지만 해라. 나도 얘기좀 하자."
그릭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사이토. 우선 한 가지만 물어보자. 왜 훈련을 받고 싶다고 했지?"
"……."
사이토가 우물쭈물하는데 그릭스는 정곡을 찔렀다.
"진짜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심심해서 해보자고 한 건 아니겠지? 미리 말하지만 훈련은 정말로 고될 거다. 너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야. 극한까지 간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라면, 그냥 관둬라."
루이즈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훈련이길래 이렇게까지 겁을 주는 거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네 심정은 이해가 간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사이토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당신도, 똑같았군요.
"무기력하지. 우리들은 지금 무기력해. 그래서 뭔가를 해보자는 건, 좋은 시도야.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되는 거야.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큰… 그런 결심이 필요하다. 더 바른 마음가짐이… 뭐 그렇지. 이해하냐?"
"… 예."
사이토는 자신이 그릭스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릭스는 충분히 지적인 남자였다. 자신이 각종 매체에서 접해온 '전형적인 흑인상'과 모습은 비슷했지만 생각의 깊이는천지차이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던, 그리고 여러 매체를 통해 주입되어 왔던 전형적인 흑인이 결코 아니었다. 넓게 보자면자신이나 할케기니아의 인간들이나 그릭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별로 차이도 없었던 셈이다.
그도 당연히 스스로에 대해서 고찰할 줄 알고 문제점이 있으면 해결할 방법을 찾는, 그런 인간이다. 사이토 자신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인생의 선배였다.
"그래. 아니… 그… 미안하다. 괜히 공격적으로 말할 것 같군."
"괜찮아요."
"고맙다. 아무튼 프라이스 대위도 그런 이유에서 저어한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아쉬워한 것이겠지. 아무튼 속시원하게인정하자고. 우리가 지금 무기력하다고.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나와 함께 훈련을 하자. 우리의 문제점을인정하고,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말야. 소프가 도와 줄거다. 콜베르 선생의 말로는 넌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모양이니까훈련의 난이도는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을 테고… 아무튼 각자를 위해서 열심히 해보자."
불현듯 나타났고 불현듯 사라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저게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인가? 생리인가? 대충 그런 잡생각을 하던 사이토는 옆에서 루이즈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뚱한 표정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심란한 표정이었는데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토는먼저 물었다.
"왜?"
루이즈는 숨을 한껏 들이쉬더니 사이토에게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주인님의 허락도 없이 왜 갑자기 훈련이니 하는 걸 혼자 멋대로 결정하는거야?"
"허락이 필요하냐.'
사이토는 귀를 후볐다.
루이즈는 분개했지만,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자기 말이라고는 죽어라고 듣지 않는 사역마이자… 이세계에서 온 남자아이.
사이토 혼자 이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았겠지만, 그 이세계라는 곳에서 온 사람이 지금 이 학원에는 사이토를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있다. 게다가 소프가 기쉬의 청동 골렘들을 상대하면서 사용했던 파괴적인 병기는 할케기니아에는 존재하지않는다.
정말로 이세계 사람이라고?
"무기력하다는건 뭐야."
"별로 상관 없잖아."
"사역마의 건강 관리도 주인님의 의무야."
"그런 이유냐."
사이토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 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심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사이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옷자락을 붙잡혀서 뒤를 돌아봤다.
루이즈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
사이토는 이마를 짚더니 바닥에 걸터 앉았다.
"그냥 할 일이 없고 할 수도 없으니까 피곤하고 지쳤던 거야."
"너는 내 사역마잖아. 사역마의 일만 충실히 하면 돼."
그렇게 말이야 어디 납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얼마전에 기쉬와 싸울 때 루이즈의 앞에서 '숙이기 싫은 머리는 숙일 수 없어' 따위의 말을 잘도 내뱉어 놓은 주제에루이즈에게 온갖 험한 일은 다 당하면서도 꼬박꼬박 사역마 일을 하는 걸 보니, 뭐…. 사이토는 그런 사실을 인정할 만큼 대범하진않았지만 무턱대고 사역마 일을 하는 것이 싫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루이즈는 청초하고… 귀엽다. 사이토 취향이니까.
지금 진지해 보이는 저 눈은 사역마에 대한 걱정쯤 될까?
남자는 슬픈 생물이구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사이토는 말을 돌렸다.
"별거 아니라니까. 난 잔다. 안녕."
"아까부터 어딜 계속 나가려고 하는거야!?"
루이즈가 사이토의 파카 자락을 붙들은 채로 놓아주지 않으면서 외쳤다.
"밖에서 자라고 쫓겨나지 않았었냐?"
"됐어. 방에서 자. 그러다 또 퀴르케가 덮치면 큰일이잖아."
사이토는 그것도 그렇겠다 싶어서 얌전히 짚더미에다가 모포를 깔았다. 입밖으로 '역시 너 나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둥의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걷어차기 싫어서 그냥 얌전히 불 끄고 누웠다. 루이즈도 얇은 네글리제 차림으로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사이토가 양손을 포개고 누워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훈련은 뭐야…?"
좀 자자!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렇지만 사이토는 그 정도는 대답해줘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냥 순순히 대답했다.
"그릭스가 말했잖아. 살아남기 위한 훈련이라고.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도 아니고, 위험천만하단 말이지."
"여기는 트리스테인 마법학원이야. 이 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
사이토는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내가 당한 걸 생각하면 별로 그렇게까지 안전한 곳은 아닌 것 같던데?"
"그야 사역마에다가 평민인 주제에 자존심이나 부리니 그랬지!"
그런 녀석이 상대라면 누구라도 싸우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이토는 꾹 참았다.
좀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아무튼 여긴 위험해. 몸을 지킬 방법을 모르는 나로써는 더욱. 아, 맞군. 내일은 소프한테 호신용 무기라도 달라고 해볼까…."
루이즈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너. 검도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 요전에 쓴 건 기쉬의 검이었어."
"검사(劍士)잖아? 너."
사이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어둠 속에서 루이즈가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니야. 검 같은 건 쥐어본 적도 없어."
"요전에는 자유자재로 다뤘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 말에 루이즈는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아까 그 검은 남자가 말했지? 콜베르 선생님이, 네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사이토는 벌떡 일어났다.
"네가 불러냈잖아. 그 사람 이름은 그릭스야. 이젠 좀 외우라고."
"들을 일도 별로 없었잖아. 이젠 외우고 있어. 아무튼, 그렇다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너의 사역마로써의 특수 능력이라는 거네…. 그래, 좋아."
그리고 루이즈는 도로 누웠다.
"뭐가 좋은데?"
"너에게 검을 사 주겠어. 퀴르케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니, 호신용 검 정도는 필요할 것 아냐?"
"어?"
사이토는 당황해서 말했다.
"의외네."
"뭐가."
"아니, 난 네가 구두쇠인줄 알았거든."
루이즈는 사이토의 무신경한 말에 그만 배게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췄다.
"아야! 왜!"
무기력하니 뭐니 해서 기껏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 평민 사역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하지만 가만 손에 집히는 걸 던지고 보니, 머리를 누일 배게가 없었다.
도로 가지러 내려가는 건 자존심 상하고… 그런데 사이토가 부스럭부스럭 하더니 배게를 침대 위에 올려놨다. 루이즈는 그런 사이토의 흐릿한 형체를(어두우므로)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더니,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쨌든 내일은 허무의 휴일이니까, 마을로 데려다 줄게. 얼른 자!"
그렇게 루이즈네가 주종관계인지 연애질인지 구분도 잘 안 되는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개즈는 트리스타니아의질퍽한 뒷골목을 뛰어다니며 한껏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지형도 잘 모르는 동네였고 바닥은 각종 오물로 뒤덮혀서 악취가 한껏올라오고 있는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개즈는 개의치 않았다. 판타지 세계의 뒷골목이라고 해도 엄연히 도시의 뒷골목. 자연속에서 새벽 이슬 맞으며 능선 아래로 발각되지 않으려 애쓰며 사주경계를 하며 이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괴… 괴물 새끼!"
개즈는 그 말을 듣고는 씨익 웃었다.
"체력이 그렇게 모자라서 어쩌냐. 직업이 직업이면 도망치는 연습도 평소에 좀 해뒀어야지."
그런데 도망치는 연습을 평소에 해왔는데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실 달음박질로 SAS 대원을, 체력으로 따돌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SAS라는 놈들은 5km를 20분 내에구보로 완주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기록으로 치는 족속들이다. 35파운드씩 되는 짐을 짊어지고 무장행군을 밥먹듯이 하면서 체력을단련한 인간을 아무리 도망치는 연습을 했다지만 체력으로 따돌릴 생각을 했다니, 꿈도 야무졌다.
개즈는 웃으면서 그대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지? 얘기 좀 하자는데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반응해서야 손님이 오겠나."
"으아아아―!"
"결국 그렇게 되는군."
절망적이었는가!
나이프를 뽑아들고, 손에 쥔 채로 달려든다. 하지만 개즈는 혀를 찰 뿐이었다. 바보같이! 나이프는 그렇게 뽑아들고 찌르려고달려드는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경시할 것도 아니었다. 나이프로 인한 전투능력 손실은 아차 하는 순간에 닥쳐올 수 있다. 개즈가아무리 전투의 달인이라지만 칼을 든 상대는 쉽게 제압할 게 아니었다.
다행히 공격이 직선적이니 피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상대는 역시 바보였다. 나이프를 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기에집착하게 된다. 이를테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종류의 심리였다. 적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심리는 뭐가 중요한지 잊게 만든다.
이 경우에는 개즈를 죽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개즈는 나이프를 뽑아들며 거리를 벌렸다. 상대는 두려운지 바로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프란 무기는 상대에게 인지되면서 정숙성을 잃는 순간에 기습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개즈는 여전히 유리했다. 왜냐면, 총이 있으니까.
상대는 개즈가 거리를 벌리며 총을 뽑아드는 것을 보고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권총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극적인 반응은, USP45 택티컬의 소음기가 달려있는 총구에서 초연이 피어 오른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탕! 하는 경쾌한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퓩. 그런 소리가 아주 무감동하게 잠깐 흘렀다. 손을 맞춰서 무기 강탈을 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은아니지만 개즈에겐 자신이 있었다.
거의 박살이 난 오른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길래 진작에 협조를 하지 그랬어."
날은 어찌나 열심히 갈아놨는지 땅에 푹 하고 박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서로 나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라면상대의 전투능력을 뺏기 위한 더티하기 그지없는 도그파이팅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프를 검집에 꽂아넣은 상태인 녀석이 비무장으로달려오는 사람을 상대로 나이프를 뽑아들고 돌격을 하다니. 초보는 어쩔 수 없나보다.
개즈는 USP45를 집어넣고 왼손에 들린 코만도 나이프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걸로는… 심심한데 협박이나 해볼까?
"입 닥치지 않으면 손바닥 구멍을 이걸로 후벼주겠다."
바로 닥친다.
매우 좋군.
윽, 윽, 하면서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좀 미안하긴 미안했다만은 나이프를 들고 죽일 작정으로달려든 상대를 동정할 정도로 개즈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개즈는 남자를 뒤돌려 세운 후 탄피를 주우며 말했다.
"일단은… 뭐, 돌아가자고.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 만약 도망치다가는 이번에는 뇌가 신선한 바람을 쐬게 만들어 준다?"
남자는 개즈를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남자의 절박함에 개즈는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개즈가 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트리스타니아의 뒷세계… 라고 할 만한 영역의 포섭.
구체적으로는, 정보원 확보였다.
그를 위해서 복면을 뒤집어쓰고 자경단(폭력조직을 겸하는)을 밟아놓고, 장물시장을 휘젓고 정보원을 쫓아다니는 등의 활약을해야만 했다. 이미 예전부터 해오던 작업이었고 메이지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 이 뒷세계에서 개즈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이번 경우는 정보원 추적이었는데… 굳이 정보원이 개즈로부터 도망 갈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개즈 본인이 흘린자신에 대한 과장된 소문 따위가 그 원인이었다고 할까. 왜 지레 겁먹고 도망을 쳤는지, 원.
그래서 정보원이 도망치기 시작했던 장소, 그러니까 은신처로 돌아왔다. 의외로 멀끔해보이는 여관에서 먹고 자고 있었는데 개즈가 들이닥치자마자 창밖으로 뛰쳐나가서 도망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쫓아다닌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보실까."
개즈의 생활 신조는, 「취조는 묶어놓고―」였다.
그래서 정보원은 의자에 꽁꽁 묶인 채로 떠들어댔다.
"뭐, 뭘 시작한다는 거요!?"
"우리 대위님을 좀 따라해볼까 했지. 그런데 자네는 핵폭탄을 누가 줬는지도 모르고 이므란 자카예프가 누군지도 모를테니 그건 생략하지. 내가 폭탄이 대체 어디서 났냐고, 이름을 대라고 두들겨 패지는 않는다는 뜻이야. 알겠지?"
알아들을 만한 부분은 폭탄이니 이름을 대라느니 하는 부분 뿐이었지만 어쨌든 냅다 두들겨 패지는 않겠다고 하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개즈는 피식 웃었다. 알긴 뭘 알어.
"내가 저번에 의뢰했던 일 말이야. 장물 시장을 이용하는 손님들 중에서 메이지는 얼마나 되는가. 구체적으로 인명록을건네달라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도망쳤지? 아아, 변명하지 마. 묻는 말에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만 해라.인명록이 있어? 없어?"
"이… 있는데…."
"어디?"
"저기 서랍 안쪽에…."
어지간히도 찾기 쉬운 데에다가 갔다놨군.
개즈는 인명록을 가져다가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굳이 인명록을 준비해 놨으면서 왜 도망쳤지?"
쉽게 대답하지 않는군.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개즈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정보원 찾으면 되니까 댁이 협조하나마나 내겐 큰 문제는 없어. 하지만 손바닥에 총구멍을 냈다고 내게 악의를 품게 된 뒷세계 인간을 그냥 보내주는 것도 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이건 어느 정도 거짓말이었다. 개즈가 무슨 조직폭력배도 아니고 약장수도 뭣도 아닌데 뒷세계 생리를 꿰어찰 수 있을리가 없지않은가. 기껏해야 이름 좀 날리기 시작했을 뿐인데…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서 시행착오가 많은 편이었고, 지금 터놓고 거래하는정보원은 이 남자 뿐이다. 다른 정보원을 구하는 것은 시간을 꽤 잡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개즈 눈 앞의 정보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정도의 정신머리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말하겠소! 말할테니 제발…."
"해봐."
"목숨을 위협받았소."
개즈가 흥미를 느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이야기인 즉슨.
최근 장물 시장에 개즈가 뿌린 이야기(인명록 관련해서 메이지를 걸러낸다는)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얘기가 좀 오간모양이었다. 이미 개즈는 소재지부터 시작해서 어느 정도는 얼굴이 팔린 인물이었는데, 그런 개즈가 인명록을 모은다는 소문이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사실 정보원이라는 종자들은 의뢰인이 뭔가 일을 의뢰했다는 사실 조차도 정보로 흘려서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놈들이니… 개즈의 인명록 이야기가 남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그 이야기에 심기가 거슬린 메이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댁도 제법 신세가 기구하군."
"반쯤은 당신이 일조한 거요. 그런 일거리, 받지 않았다면 죽을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겠지. 책임지시오."
"정보를 팔아먹은 건 내가 아닌데.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내게 인명록을 건네주면 댁을 죽이겠다고 했다? 내가 아니고, 당신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개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덮치는 편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건 일종의 경고… 아니, 경고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좀 초보적인데….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운이 좋다.
"구체적으로 무슨 협박을 당했지?"
"인명록을 넘기면 죽인다는 협박."
"메이지인건 확실하나?"
"공중에 띄워졌소."
"인상착의는 기억이 나나?"
"맨 입에는 말 못하지."
자식이, 배짱 좀 있는데.
"… 좋아. 성의를 보였으니."
개즈는 밧줄을 풀어줬다.
구멍이 뻥하고 뚫린 손부터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개즈가 말했다.
"덧붙여서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지. 그러니까 말해봐. 누구야? 대체?"
정보원은 오른손을 조심스레 무릎 위에 올려둔 채로 얘기를 꺼냈다.
"키가 160상트 정도였소. 목소리는 마법으로 변조를 했기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데…."
"다른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나?"
"어… 그게… 아, 그게 있었군. 머리카락이 초록색이었소."
"초록색? 확실한가?"
"그렇소. 연한 초록색. 머리카락을 흘리고 갔기 때문에 확신하고 있소."
그건 좋은 정보로군. 개즈는 제법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에큐 금화가 몇 닢 들어있는 주머니를 안겨주면서 말했다.
"한가지 더 궁금한데, 대체 인명록까지 준비했으면서 그걸 가지고 도망이라도 치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뭐지?"
"… 그야, 당신이 찾아오기 바로 전에 협박을 당했으니까 그렇지. 개즈, 당신이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엇갈리진 않았을 거요."
그런 건 진작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까지 습격을 당하지 않았으니 이미 이 주변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어째 상대는 급해보이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치료비라도 하라고 평소 때보다 더 넣었소."
"녀석이 다시 찾아오면 어쩌지?"
개즈는 피식 웃었다. 상대로써는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개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야 댁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아무튼 살려주려고 노력은 해 볼테니 당신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금은 내 코가 석자라."
SAS 22연대원 한 사람이, 트리스타니아의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보원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구멍이 휑하게 뚫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창밖으로 그리고 손바닥의 구멍 너머로 점처럼 줄어드는 개즈의 모습이 보였다.
# by | 2008/07/25 15:08 | 끼적끼적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